‘그 쇳물 쓰지 마라’ 댓글 시인 제페토 첫 시집

2010년 뒤 댓글 시 포함 120여편
한국 사회 아픔·그늘진 곳 ‘눈길’
신원 확인 거부…40대 남성 추정

“광염(狂焰)에 청년이 사그라졌다./ 그 쇳물은 쓰지 마라.// 자동차를 만들지 말 것이며/ 가로등도 만들지 말 것이며/ 철근도 만들지 말 것이며/ 바늘도 만들지 마라.// 한이고 눈물인데 어떻게 쓰나.// 그 쇳물 쓰지 말고/ 맘씨 좋은 조각가 불러/ 살았을 적 얼굴 흙으로 빚고/ 쇳물 부어 빗물에 식거든/ 정성으로 다듬어/ 정문 앞에 세워주게.// 가끔 엄마 찾아와/ 내 새끼 얼굴 한번 만져보자, 하게.”(‘그 쇳물 쓰지 마라’ 전문)2010년 9월 충남 당진의 한 철강업체에서 일하던 젊은 노동자가 작업 도중 용광로에 빠져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. 용광로에는 섭씨 1600도가 넘는 쇳물이 들어 있어 숨진 이의 주검을 찾을 수 없었다. ‘그 쇳물 쓰지 마라’는 이 사건을 보도한 기사에 ‘제페토’라는 이름을 쓰는 누리꾼이 조시(弔詩) 형식으로 쓴 댓글이었다. 여느 댓글과 달리 시 형식을 띤 이 댓글에는 다시 4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고 일각에서는 시에 쓴 대로 숨진 청년의 추모 동상을 세우자는 모금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. 제페토는 그 뒤에도 시 형식 댓글을 꾸준히 달았고, 그의 댓글 시를 부러 찾아 읽는 독자들도 생겨났다. 제페토에게는 ‘댓글 시인’이라는 이름이 붙었다.시집 <그 쇳물 쓰지 마라>(수오서재 펴냄)는 제페토가 쓴 댓글 시 120여편 가운데 80여편과 그가 따로 블로그에 쓴 시 47편을 한데 묶은 책이다. 블로그에 쓴 시 역시 표제작의 후일담에 해당하는 ‘용광로 청년의 연말’을 비롯해 ‘노숙인 대피소’ ‘쪽방촌의 겨울’ ‘복권’처럼 한국 사회의 그늘진 곳에 눈길을 준 작품이 다수를 이룬다.“아버지 때처럼/ 오늘도 더웠습니다/ 물려주신 가난은 넉넉했고요// 체리를 훔쳤습니다/ 피치 못할 사정을 읍소해보고도 싶지만/ 나라님은 알 바 아닐 테고/ 가난에 관해서는/ 얘기 끝났다 하실 테죠// (…) // 돌아가 아이들에게/ 벼슬 같은 가난을/ 세습해주어야겠습니다”(‘체리와 장군’ 부분)체리를 먹어 보지 못한 초등생 자식들에게 체리 맛을 보여주고자 아파트 현관문 앞 시가 3만원짜리 체리 택배 상자를 훔친 엄마에 관한 기사에 단 댓글 시다.“돌아보지 말 것./ 섭섭한 마음 들거든/ 낯익은 얼굴 앞을 두어 번 선회할 것./ 바다에는 벽이 없으니/ 서남쪽으로 한 시간쯤 내달려/ 맺힌 응어리를 풀어줄 것./ 흰긴수염고래, 바다거북, 해마, 문어/ 새우를 만나면 그처럼 허리 숙여 인사 나눌 것./”(‘당부’ 부분)

2014년 5월17일 저녁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‘세월호 참사 추모 5.17 범국민 촛불행동'에 참석한 시민들이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. 강창광 기자 chang@hani.co.kr
2014년 5월17일 저녁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‘세월호 참사 추모 5.17 범국민 촛불행동’에 참석한 시민들이 거리행진을 하고 있다. 강창광 기자 [email protected]

2009년 포획돼 서울과 제주 수족관에서 공연에 동원됐던 남방큰돌고래 제돌이와 춘삼이가 2013년 7월 제주에서 방류돼 고향 바다로 돌아갔다는 기사에 단 작품이다.댓글 시인 제페토의 신분은 확인되지 않았다. 본인은 대면 인터뷰는 물론 출판사를 통한 서면 인터뷰 역시 마다했다. 나이와 성별을 확인하기 어려운데, 2010년 건물 3층 외벽 유리창을 청소하다 추락사한 김모(41)씨에 관해 쓴 댓글 시 ‘이름 모를 친구에게’에 “하필 당신 나와 같은 나이냐”라는 구절이 나오는 것을 참조하면 40대 중후반 남성일 것으로 짐작된다. 2014년 5월 세월호 추모 집회(사진)와 관련해 쓴 시 ‘집을 나서며’를 보면 그는 댓글 시와 집회 참여로 한국 사회의 아픔에 공감하고 동참하고자 하는 건강한 시민으로 보인다.“나는 염세주의자인데/ 지독하게/ 겁도 많은데/ 광장행 버스를 타겠다// 방석 대신/ 소설이 빼곡한 신문지를/ 아스팔트 위에 깔고 앉아서/ 세상 바닥이야 으레 차가웠으니/ 그러려니 하겠다// 요구하겠다. 듣든 말든/ 미치도록 하고 싶던 말을/ 물론, 소리치기에 앞서/ 살아만 있던 입은 오늘부로 죽이고/ 성층권에서만 배회하던 머리도/ 뚝, 떼어 버리고// 주먹을 쥐고서/ 고개를 들면서”(‘집을 나서며’ 전문)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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